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세계객속간친대회의 사이트 그리고 위키피디아 등에서는 전 세계 객가의 인구를 약 8000만 명, 4000만 명 그리고 656만 명 등으로 서로 다르게 집계하고 있다. 8000만 명과 656만 명은 12배나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의문을 일단 접어두고라도, 이들 집단이 세계 곳곳에 퍼져있으므로, 그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지역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로 객가를 찾아 나설 것인가? 어디에 사는 객가 집단을 나의 연구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연구대상의 선정은 어떤 엄밀한 기준과 적합성에 기반하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과정은 종종 우연과 인맥을 통해 이루어진다. 2005년 석사 논문을 완성하고 홍콩의 중문대학에서 관련 주제로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만난 홍콩의 장(張)교수1는 내가 객가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최근 객가의 전통가옥인 토루(土楼, Tulou)를 석사논문을 마친 엽(葉) 양을 소개해 주었다. 또한, 본인이 음식 인류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는 홍콩의 객가 식당에 초대해 주셨다. 엽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화안현(华安县)에 있는 이의루(二宜楼)라는 토루에 대해 논문을 작성했고, 그곳은 본인 어머니의 고향이라며 지인을 소개해주었다. 나는 홍콩에서 발표를 끝내고 장 교수의 지도 학생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서 소개받은 지인을 만났고, 그는 18세기 청 건륭제(乾隆帝) 때 30년에 걸쳐 지어진 토루로 나를 안내했다.
1740년 장(蔣)씨 14세 장사웅(蔣士熊)에 의해서 건립된 이의루는 9300 제곱미터에 지어진 지름 73.4m의 4층 원형 건물이었다. 약 50세대, 200~300여 명이 살았던 건물의 중심인 둥근 마당(중정)에 우물 2개와 사당이 있고, 1층에는 주방, 창고, 2층에는 침실, 3층에는 방과 창고, 4층에는 조상의 신위를 안치한 신감(神龕)으로 구성되어 각 세대가 1층에서 4층으로 구성된 공간을 소유2하고 있었다. 1996년에는 국가중점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현지의 많은 젊은이가 직장을 찾아서 도시로 떠나서, 내가 방문했을 당시 주로 노년층이 손자, 손녀 등과 함께 토루에 살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복건성 지역의 객가는 주로 서부, 남서부의 산간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토루는 특히 외부의 공격이나 포위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방어형 주거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토루의 1-2층에는 바깥으로 난 창문이 없고, 외부를 감시할 수 있는 총안(銃眼)이라고 불리는 구멍들이 있다. 이 구멍들은 다시 외부 적의 동향을 감시하는 구멍(瞭望孔)과 총과 활 등을 쏠 수 있는 구멍으로 구분된다. 30년에 걸쳐서 짓은 요새 같은 웅장한 건물에 사는 같은 성씨의 집단이 근 300년을 살아온 근거지에서 나의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객가가 이방인, 손님이라면 주인이자 그 지역의 터줏대감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지 완벽하게 무장한 객가 집안의 영광스러운 흔적이었다.
객가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나향림(羅香林)3에 따르면 광동(廣東), 복건(福建), 강서(江西)지역을 객가의 발원지 혹은 고향이다. 이 지역 정착하면서 객가는 비로소 그들의 언어와 문화의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했으며, 그들이 떠나온 조상집단의 고향인 중원(中原)을 원향(原鄕)이라고 구분했다(羅香林, 1933). 이들이 이주한 복건성의 지역이 산간지역에 밀집되어 있어서, 객가의 적 혹은 주인집단과의 갈등의 현장을 역사 문헌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광동성의 객가지역은 다르지 않을까? 나는 실망감을 애써 추스르고 텅 빈 성채를 뒤로 한 체 광동성 매현(梅縣)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중국 객가의 60%에 달하는 인구가 사는 매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기대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스키너의 책에서 보았던 태국의, 그리고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객가의 고향에 내가 곧 도착한다. 그때 앞 좌석에 앉은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와, 한국요? 중국어를 잘하시네요.”
-네, 중국어를 공부했어요.
“나는 한국 사람 처음 만나요. 한국드라마는 재미있게 보는데…….”
-요즘 중국에서 한국드라마를 참 많이 방영하나 봐요.
“그런데 여행 중인가 봐요. 어디로 가요?”
-글쎄요, 여행이라기보다는…. 객가 연구하러 매현에게 가요.
“객가 연구요? 뭐에 관한 연구요? 나도 객간데…….”
-오, 그래요? 반가워요. 매현에는 객가가 많이 사나요?
“이 기차에 탄 사람들 다 객가에요. 매현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객가에요. 그런데 객가의 뭘 연구하시는 건가요?”
-그게, 음…. 제가 하려는 연구는…. 그러니까, 객가의 정체성과 관련한…. 매현에는 객가 아닌 사람은 없나요?
“글쎄요, 대부분이 객가고 요즘은 외지인들도 더러 있지요. 가응대학(嘉应大學)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에 객가를 연구하는 곳이 있는 것 같아요.”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객가를 연구하러 간다고 스스로 소개하면서 정작 무엇을 연구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상황이다. 기차가 매현에 도착했고, 나는 벅찬 마음과 겸연쩍은 마음이 교차했다. 나는 누구의 소개로 이곳에 온 것도,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도 또 어떤 목적지를 정해 놓고 온 것이 아니었다4. ‘그래서 연구 주제를 어디서 찾지?’ 하는 막연함이 찾아오던 순간 인력거 한 대가 내 앞에 멈추어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기차에서 만난 객가 남자가 언급했던 ‘가응대학’이 번뜩 떠올랐고,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가응대학은 성 안의 오래된 캠퍼스와 성 밖의 새 캠퍼스가 있다며, 다시 한번 정확한 목적지를 물었다. 나는 객가연구소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매현은 처음이며 한국에서 객가를 연구하고 싶어 왔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인력거꾼은 반갑게 웃으며 가응대학에 가는 길에 예전 객속대회(세계객속간친대회)를 개최한 장소를 알고 있으니 잠시라도 구경하고 가라며 큰 저택 앞에 인력거를 세웠다. 그는 대문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을 찾아서 나를 소개했다.
“여기 오소저(吳小姐)는 한국에서 온 객가 연구자랍니다. 가응대학에 가는 길에 내가 여기 와서 주인장을 꼭 만나보라고 했어요. 객가의 위용옥(圍龍屋)을 구경시켜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잘 오셨소. 반갑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1994년 세계객속대회를 개최했지요.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위용옥이라고 불리는 가옥은 그 형태가 복건성의 토루와는 전혀 달랐다. 용을 가두어 둔 집이라고 하여, 앞에는 커다란 반원형의 연못이 있고, 뒤쪽의 화대(化胎)라고 하는 반원형의 풀밭 그리고 화대를 둘러싼 용옥이라고 하는 방들이 있다. 그리고 연못에서 화대에 이르는 중심축에는 ㅁ형의 건축물이 연이어 배치되는데, 화대에서 가까운 가장 안쪽의 상당(上堂)에 조상의 위폐를 모시고, 중간의 중당(中堂)에 씨족들이 모여서 회의하고, 관혼상제 등 각종 의식을 치르고, 씨족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깥쪽의 하당(下堂)은 비교적 협소하며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되는 공간으로 문당(門堂)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앞의 반원형 연못과 뒤의 반원형 화대를 하나로 보면 원형이요, 중간의 ㅁ형 건축물은 네모로 고대 중국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을 둥글고 땅을 네모나다(변화와 운동, 무한의 우주, 순환 vs 안정과 고정, 인간사회와 지상)는 뜻을 담고 있다. 이 ㅁ형 건물 양쪽으로 두 겹, 혹은 세 겹으로 방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를 횡옥(橫屋)이라고 부른다. 위용옥 주인의 설명을 들으며, 전쟁과 이민족의 침략 속에 잦은 이주를 했던 객가들이 이주의 이주를 거치며 씨족끼리 뭉쳐서, 난공불락의 안전한 집을 지으려 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크고 견고하며, 풍수지리 철학에 기반하여 자손의 번창과 씨족의 번영을 위해 지은 집은 이제 낡고, 편하고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역사 속의 공간이었다.
위용옥 주인의 집 소개를 함께 듣고 나온 인력거꾼은 마치 국빈급 의전 차를 운전하듯 나를 인력거 뒤에 태우고 객가 연구소에 데려다주었다. 그에게 나는 우수한 객가의 전통과 역사를 연구해서 그 정신을 널리 퍼뜨릴 소중한 이방인 학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성안의 가응대학 캠퍼스에는 객가 연구소가 있었고, 거기서 객가를 연구하려는 한국 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방학가(房學嘉)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객가학을 전공하며 석사과정에 있는 학생 이해동(李海東)과 일본에서 매현 지역의 위용옥을 연구하러 온 박사과정 학생 飯倉 宏治도 소개해주셨다. 이해동은 명나라(1490) 때 지어진 위용옥인 인후온공사(仁厚温公祠)로 나를 안내했는데, 이 가옥은 인력거꾼과 함께 보았던 위용옥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하지만 구조는 비슷했지만 390여 개의 방과 더 넓은 삼 당과 건물 사이의 천정(天井), 통로, 안뜰이 연결되어 작은 마을을 연상시켰다. 그는 방원장이 원래 지역의 교육자로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위용옥와 같은 지역의 가옥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하면서 객가 문화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했다.

복건성과 광동성의 객가지역을 방문하여 각 지역에서 접한, 객가 전통가옥들은 흥미로웠지만, 그것은 나의 연구주제가 될 수 없었다. 전통가옥은 객가들이 현재를 살고 곳이 아니라, 민속촌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0-500년 전의 객가들이 복건성과 광동성의 지역에 이주해 왔을 때, 각 씨족이 힘을 모아 요새 같은 집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그 시대에 멈추어서 그곳을 찾는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춘절(春節, 음력 설), 혼례, 상례 그리고 제사 등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다면 가옥의 주인들은 도시에서 혹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이 전통가옥으로 모인다. 이 특별한 가옥들의 구조와 배치, 건축재료와 건축 과정 역사, 건축물 곳곳의 글과 그림 그리고 상징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시작한다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드러나지 않는 의식세계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특별한 시기를 기다리며, 관광지 혹은 문화재로 지정된 곳에서 물질문화를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토도로프는 코르테스가 타자를 이해하는 태도와 방법 역시 바판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신화와 예언, 의례의 의미를 파악하여,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신성시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상징을 읽어내고 이를 이용해 그들을 지배한 것이다(Tzvetan Todorov, 1982). 나의 경우엔 객가를 지배할 일도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객가를 나와 다른 “원주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남겨진 200-500여 년 전의 가옥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또 다른 형태의 가옥에 200-500여 년 전의 나의 조상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끊임없는 이주의 삶 속에서 형성된 감정, 그리고 지역을 초월해서 전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내는 그 원동력의 이면에 나는 객가의 정체성이 있으며, 그러한 정체성을 단지 지역마다 서로 다른 건축양식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방 원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중국 남부지역의 객가 가옥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책장 구석에 꽂아 두는 것으로 짧은 객가 고향 탐방을 끝마쳤다. 객가의 고향에서 나는 연구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