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가를 연구하기 위해 나는 중국 본토 다음으로 객가의 인구가 많은 대만1에 가보기로 했다. 객가의 고향으로 불리는 중국 본토의 지역들을 방문하고 나의 관심이 그곳에 없음을 깨달았고 따라서 연구가 가능한 기타 지역을 지속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린 선택이었다. 마침 국립대만대학은 한국과의 교환학생제도가 있는 학교였고, 객가에 대한 현지 조사지로 대만을 선택한 것이 적절했던 것인지 그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나는 연구대상에 관한 탐사를 지속할 수 있었다.
2006년 9월 대북(臺北,Taipei)에 도착했을 때, 처음 나를 맞아준 사람은 씬팅이라는 대만대 법학과에 재학생과 이짱이라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대대(臺大, 국립대만대학을 대만인들은 줄여서 대대라고 부른다.)에는 외국교환 학생을 위한 파트너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씬팅도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신청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학교 공대에 재학 중인 이짱은 대만 북부 신죽(新竹, Hsinchu 대만 북부 객가지역) 출신의 객가였다. 내가 객가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씬팅은 대만에서 객가 출신 남자들은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다며, 객가들은 중남경녀(重男輕女, 남존여비와 같은 뜻) 경향이 강하고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이어서 특히 남편감으로 최악이라며 앞으로 미래를 누구와 함께할지는 두고 봐야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대만 여성의 객가 신랑감 기피가 종갓집 장손과 결혼을 꺼리는 한국 여성의 심리와 같은 것 아닐까? 유추해 보았다.
객가의 이주와 개척 생활에서 객가 여성들이 농사와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따라서 객가 여성들은 전족(纏足, 중국에서 송나라 이후 한족을 여성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드는 관습)을 거의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바 있다2(¹Lee 2019, ²Ardizzoni, ³Ko 2005). 객가 여성들이 남성과 같은 “보통”의 발을 유지하게 된 것은, 험난하고 열악한 삶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함이었으므로 그들은 남성과 “평등”하게 많은 노동을 감당했다. 하지만 씬팅을 비롯한 대만 여성들의 불만은 그렇듯 강도 높은 노동이 결국 시집인 씨족의 경제적인 부와 번성을 위해 강요된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는 2008년 본격적으로 현지 조사를 시작하는 시기에, 한 객가 가족(객가 출신의 부부와 아들, 딸로 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 부인은 이러한 객가의 특성을 몸소 보여주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그녀는 묘리(苗栗, Miaoli 대만 북서부 객가지역) 출신의 객가로 내가 조사 기간 머물었던 대북(臺北) 집의 안주인이었는데, 내가 객가를 연구한다고 하자 나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했다. 그녀의 아들과 딸은 각각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이었는데, 나이가 많은 아들보다는 어린 딸에게 많은 심부름을 시켰다. 예를 들면 과일을 준비하는데, 변색을 방지하기 위해 깎은 사과를 소금물에 잠시 담근 후 접시에 올리는 등 과일 준비과정을 설명하고 그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일이 여자가 집안에서 해야 할 일임을 가르쳤다. 반면에 아들을 과일 준비가 끝나자, 어서 와서 먹으라는 말로 남자의 정해진 역할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또 객가들의 근검절약 정신을 강조했는데, 다소 어두운 화장실에서 낡고 빳빳한 색바랜 수건으로 손을 닦는 순간 나는 그 정신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과 정서가 내게 전혀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제사 때마다 하루 종일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음식 장만에 동원되는 며느리들과 차려진 제사상에 절하며 음복과 음식을 즐기는 역할만 부여받은 자식과 자손들의 모습을 체험하고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을 반드시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나에게는 부재했고, 나는 굳이 객가 여성을 주제로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Source from oftaiwan.org
대만에 1년간 교환학생으로 머무르며 학기 중에는 대북의 학교에서 생활하고, 방학 중에는 대만의 객가 지역을 방문했다. 대만 인구 2360만 명 중 객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15%~20%인 420만에서 470만 명에 달하는데 (World bank,2025) 대만 북부의 신죽현(新竹縣, Hsinchu County), 묘리현(苗栗縣, Miaoli County), 도원(桃園, 일부 구역), 중부의 대중(台中, 일부 산간 지역), 남투(南投, 일부 마을) 그리고 남부의 고웅(高雄縣의 六龜, Lak-kuei, 美濃, Meinong), 평동(屏東縣의 六堆, Liudui) 등 다양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각 지역의 객가 마을은 서로 사용하는 객가어도 차이가 있고(대만에서는 사현四縣, 해육海陸, 대포大埔, 요평饒平, 조안詔安 등 다섯 가지의 객가 방언이 존재), 각 지역의 사회. 문화적인 특징도 다르게 존재한다.
평동(屏東)의 육퇴(六堆) 지역의 경우 1721년 발생한 주일귀(朱一貴) 사건3때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봉기군에 대항해 객가 마을들이 7개의 영(營)을 조직하여 청나라 관군을 도와 싸웠고 승리했다. 청 강희 60년(1721년)에 이를 기념하여 ‘의민’(義民) 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충의정(忠義亭)을 세웠다(《重修忠義亭碑記》 필자번역).
그런가 하면, 앞에 언급했던 이짱의 고향인 북부 신죽지역에는 청나라 시기 1786년부터 1788년 사이에 발생한 임상문(林爽文)사건4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희생된 객가인들을 기리는 건륭제의 ‘포충(褒忠)'이라는 칭호와 유해가 안장된 의민묘의 건립, 그리고 이를 통해 북부의 각 씨족들이 연합하여 공동체의 신으로 추앙한 사건은 지역 객가 정체성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묘리(苗栗) 지역의 대조춘 사건(戴潮春 事件, 1862~1865)은 청나라 시기 대만에서 발생한 ’3대 민란‘ 중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된다. 창화(彰化) 지역의 유력자였던 대조춘이 비밀결사인 천지회(토호 조직)를 이끌고 1862년 봉기를 일으켜 묘리와 신죽일대를 위협하자, 이 지역의 객가 씨족(신(沈)씨, 임(林)씨, 황(黃)씨, 진(陳)와 유씨(劉)씨)등이 마을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의병 조직을 가동했으며 청의 관군과 함께 봉기를 집압시켰다.
진려화는 역사적인 사건과 의례를 통해서 사회적인 기억(Collective memory)가 재생되는 과정을 대만 객가의 의민신앙(義民信仰)의 통해서 보여주었다. 각 지역에서 청나라의 관료와 대수를 차지했던 복건성 출신의 지역 세력과의 갈등과 다수의 복건성 출신 세력과 대립 관계에 있던 소수의 광동성 출신의 씨족 세력은, 통치세력인 청의 관군을 도와 봉기를 진압함으로 국가로부터 ‘의민’으로 인정받으며, 각 지역에서 유사한 기억이 쌓이며 씨족의 경계와 지역의 범위를 넘어 객가 정체성을 형성한다(陳麗華, 2015). 이렇듯 국가에 의해서 수집된 사건들은 포개어져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
「從來人生總有一死,死得其死,死後猶光。自昔諸匪叛逆有朱一貴、林爽文、戴萬生,渠魁者匪勢強橫,城池陷落;臺島孤懸海外,幾幾乎勢有難守者。我粵民義起扶官,不顧身家、不惜性命,血戰沙場,賊勢而蕩平之。捐軀報國,其身雖死,其名卓著,此可謂死得其死矣! 雖耕鑿小民而為國勤王,尚知舍生取義,史冊中永垂不朽矣!」 (1905 重建義民廟碑記(甲))
(인생은 누구나 죽음을 면치 못하나,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면 사후에도 영광이 빛난다. 예로부터 반역자 중에는 주일귀, 임상문, 대만생(戴潮春의 별명) 등이 있었으니, 그 우두머리들은 세력이 강해 성읍을 함락시켰고, 대만 섬은 외해에 고립되어 수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광동 백성들은 의를 일으켜 관리를 보좌하며, 가업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피를 흘리며 전장에서 싸워 도적 세력을 진압하였다.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니, 비록 육신은 죽었으나 그 이름은 빛나니, 이를 죽음을 당할 만한 죽음을 당했다고 할 수 있도다!)
유교적,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남녀차별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계승하는 강인한 여성상을 가진 객가, 지역의 권력 다툼 속에서 열세를 ‘부패한’ 중앙권력과 결탁하여 우세한 상대를 꺾고 국가로부터 ‘의로운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객가는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형성했다. 내가 애초에 이국만리에서 토박이들로부터 차별과 수난을 겪었을 것이라고 느꼈던 동질감에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터졌다. 객가는 어쩌면 그러한 ‘차별과 수난의 역사’를 전략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능구렁이일지 모른다. 이로써 나의 “라스 카사스적 태도”는 한계에 부딛쳤다. 토도로프는 라스 카사스가 타자를 도덕적으로 이상화(idealization)하여 현실에서 삭제시켰으며, 이러한 태도 역시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해 도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Tzvetan Todorov, 1982). 객가는 나에게 “순수한 피해자”이자 삶의 역경을 극복한 승리자였으나, 그 역경은 삭제와 삽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수정되었고, 그 승리가 정의롭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객가의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 것인가? 대만의 수많은 객가지역의 서로 다른 지리적 배경, 지역사회의 상이성, 그리고 차이들을 마주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무렵 한 교수님이 본인의 고등학교 동창이 조안(詔安)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으며, 아마 객가일 것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그렇게 만난 조안객가는 드디어 나의 연구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