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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
말씀의 집, 문화의 자리: 말씀의 집
series
최남주
필드노트
... 인도네시아 토라자

  1. 본명 얀리아누스 티란다(Yanrianus Tiranda). 퐁인탄은 종자명호칭(teknonym)이다. 본인과의 합의 하에 본명으로 표기한다. 

  2. 이하 퐁인탄을 제외한 모든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다. 기독교단 ‘토라자 교회’(Gereja Toraja)의 전(前) 총장인 유수프 목사는 란테톳롱 교회 소속은 아니지만 통코난 룸바엣 측의 초청을 받아 이 날의 예배를 집전했다. 

  3. 통코난의 구성원이 되는 친족 집단. 3부 참조. 

  4. Kathleen M. Adams, Art as Politics: Re-crafting Identities, Tourism, and Power in Tana Toraja, Indonesi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 58. 

  5. 엘리아(Elia) 목사와의 면담(2024.01.16.). 

  6.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다면 성경 번역은 한국어 새번역(RNKSV)을 준용한다. 

  7. 이에 반해 가톨릭의 미사는 영성체가 의례적 핵심에 해당한다. 그러나 영성체 역시 육신이 된 ‘말씀’을 ‘먹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결국 ‘말씀’과 관련된다. 

  8. 토라자 교회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선교단(GZB)의 영향 아래 설립된 교단인만큼, 다른 개신교 교단과 마찬가지로 ‘말씀’의 전례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거행한다.  

  9. T: tongkonanna sangdunduan pindan, esunganna to sangirusan gori-gori.  

  10. Charles S. Peirce,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31). cf. Eduardo Kohn,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퍼스는 “상징”과 달리 닮음과 가리킴의 원리로 무언가를 나타내는 기호를 각각 “도상”(icon)과 “지표”(index)라고 칭했다. 이에 착안하여 콘은 에콰도르 아빌라의 숲이 “생각하는”(think) 원리를 닮음과 가리킴으로 설명했다. 숲은 도상과 지표로써 생각한다. 

  11. 아래에서 볼드체로 표기한 부분은 토라자어, 그 외는 인도네시아어이다. 

  12. “피와 뼈”(T: rara buku)는 혈육의 유대를 가리키는 토라자식 표현이다. 

  13. Richard Bauman and Charles. L. Briggs, “Poetics and Performance as Critical Perspectives on Language and Social Life,” Annual Reviews of Anthropology 19 (1990): 59-88. 

  14.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15. 2024.08.07. 

  16. 3부 참조. 

4. 말씀의 집

하늘 중앙으로부터 주님의 황금 팔찌 [같은] 축복이
우리 고대하는 축복이 건너오길
창궁 배꼽으로부터 창조주의 황금빛 울창한 은혜가
우리 앙망하는 은혜가 헤엄쳐오길
그럼 우리 모두 복되리라, 우리 몸체는 복되리라
오라
오라
오라 온전한 은총의 활력이여
환호하라 환호할 자여
박수쳐라 박수칠 자여
워어 허허 허허 허이...

“워허허허 허이!” 호응하여 따라서 외치는 좌중의 함성이 흥겹다. 30여분에 걸쳐 울려퍼진 퐁인탄1의 연설이 이렇게 마무리된다. 퐁인탄의 정력적이고 “울창한“ 목소리는 이날 망라라 잔치에서 가장 ‘전통적인’ 장면을 빚어냈다. 그의 연설은 퍽 기독교적인 어투로 축복을 기원하며 끝났지만, 마지막까지도 전통적인 언어의 울림이 그득했다. “황금 팔찌 [같은] 축복,“ ”창궁 배꼽,” “울창한 은혜” 등 기독교적 개념을 표현하는 말조차도 고풍스러운 의례언어의 말씨를 간직했으니 말이다.

‘맛파라팟’(T: ma’parapa’)으로 통칭되는 의례연설가의 모두(冒頭) 연설은 좌중에게 의례의 시작을 알려, 앞으로 거행될 의식을 예비케 한다. 그러니 퐁인탄의 연설이 끝나도 망라라는 이제 시작이다. 무엇보다 망라라 의례의 ‘본편’이 아직이다. 기독교 전래 이전의 ‘순수한’ 전통을 따른다면 가옥 건물에 돼지 피를 뿌려 새로운 통코난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의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축의 피를 흩뿌리는 이교적(異敎的) 의식은 기독교의 섭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자 “창조주”이신 그분을 공경하는 의례, 예배를 거행한다.

통코난 룸바엣의 잔치는 망라라 ‘예배’의 식순으로 접어들었다. 토라자어 찬송가가 송영으로 울려퍼지는 동안, 란테톳롱(Rante To’long) 교회에서 파견된 당회 일동은 통코난 처마밑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원로 목사 유수프2 씨가 앞으로 나와 연단에 섰다. 목사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공용어이자 토라자 교회의 제1언어인 인도네시아어로 예배의 시작을 선포한다.

이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됩니다.

통코난 룸바엣의 망라라 의례에서 공적으로 처음 사용된 표준 인도네시아어 구절이다. ‘맹약’(I: votum)이라 불리는 이 짧은 선언문은 고풍스러운 토라자어로 일관했던 퐁인탄의 연설과 좋은 대조를 이루며, 앞으로 예배에서 인도네시아어가 주로 쓰일 것을 예고한다. 동시에 이 선언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경건한 분위기로 좌중을 이끈다. 조상의 이름이 쩌렁쩌렁 울려퍼지던 통코난 앞마당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받드는 기독교인의 엄숙한 예배당이 된다. 좌중은 “아멘 아멘 아멘”이라는 가사의 짧은 찬송으로 화답하며 자세를 골랐다. 남자들은 피우던 담뱃불을 끄고, 여자들은 옆사람과 나누던 환담을 멈췄다.

지금까지 망라라 의례의 주역은 단연 통코난 룸바엣과 그 ‘라푸’(T: rapu)3, 그리고 이들의 대변자 퐁인탄이었다. 예배의 시작과 함께 또 다른 주역들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예배를 집전할 유수프 목사와 목사를 도와 예배 진행을 보조할 란테톳롱 당회 일동이다. 당시 통코난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통코난 룸바엣의 라푸, 그리고 라푸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하객들이었다. 어느 쪽이든 각자의 집을 대표하여, 집의 이름으로 참석한 이들이다. 유수프 목사 일행은 어떤 ‘집’에서 왔을까? 그들 역시 라푸의 초대를 받아 이 자리에 왔지만, 단지 ‘하객’으로서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는 교회로부터,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왔다.

토라자에서 교회는 여러 별칭으로 불린다. 성경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집’ 외에도 “큰 통코난,”4 “모두의 통코난”5 등 ‘통코난’을 언급하는 토라자 특유의 별칭들이 교회를 가리킨다. 이때 ‘통코난’이 뜻하는 바는 일반적인 통코난과는 다르다. 통코난은 조상의 집이자 조상의 혈통을 잇는 자손들의 집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통코난’도 어떤 ‘혈통’을 잇는 자들의 집이고, 그 혈통의 정점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나 이 혈통은 세속적인 혈통을 초월하는 영적 혈통, 말하자면 믿음의 혈통이다.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났다”(요 1:12-13)6. 교회는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자녀”의 집이다. 이 ‘자녀’의 잠재적 범위는 토라자 전역의 기독교인, 나아가 전 세계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 걸치기에 교회는 “큰 통코난”이고 “모두의 통코난”인 것이다.

그들이 믿는 “이름”이란 단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다. 헌데 예수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1:1).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자신이기도 했던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요1:14), 그가 예수이다. 기독교인은 이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바, 그 믿음은 단순한 내적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씀”이신 신을 ‘믿으며’ 공경하는 의례, 즉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말이다. 한편 예배는 문자 그대로 신의 ‘말씀’을 선포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개신교7의 예배는 ‘말씀’의 전례, 즉 신의 ‘말씀’이 적힌 성경을 봉독하고 해당 구절을 목사가 설교로 풀이하는 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8. 철두철미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말씀’은 신의 이름이자 신의 말이고, 또 그 말에 관해 담론하는 의례이다.

교회는 일요일마다, 또 성탄절과 같은 기독교의 명절마다, 이렇게 다의적인 말씀이 선포되는 집이다. 말하자면 ‘말씀의 집’이다. 유수프 목사와 란테톳롱 당회는 이 ‘말씀의 집’의 사람으로서, 통코난 룸바엣에 말씀을 날라왔다. 이날 예배에서 그들이 선포한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발췌한 것이다(골 3:12-1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유수프 목사가 봉독한 인도네시아어 성경의 해당 구절이다. 분명 목사의 음성으로 읽혔지만, 목사 자신의 ‘말’은 아니다. 이것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감을 받아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유수프 목사가 통코난 앞마당의 좌중에게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여러분, 서로 용서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평화로 한 몸이 되십시오. 말씀으로 풍성한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여 이곳은 의례언어상에서 교회의 별칭, 즉 “한 접시로 입 축이는 이들의 통코난, 한 그릇으로 마시는 이들의 자리”9에 걸맞은 장소가 된다. “한 접시”의 말씀으로 좌중이 “목 축이는” “자리,” 통코난(축자적 의미로 ‘앉는 장소’)이 된다. 조상 ‘넷포까테[의 집]’이자 이제는 ‘통코난 룸바엣’이 되려는 이 집은 우선 교회를 닮은 말씀의 집이 되는 것이다.

앞서 퐁인탄은 토라자 전통의 의례언어로 서로를 나타내며 커가는 사람, 나무, 집들의 숲을 그렸다. 통코난 룸바엣을 꼭 그런 숲으로 그려냈다. 같은 자리에서, 유수프 목사가 전하는 말씀은 “용서,” “사랑,” “평화”로 연대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그린다. 그러나 퐁인탄과는 썩 다르게, 다른 언어로 그린다. 토라자 의례언어의 숲에서 사람, 나무, 집은 서로를 닮으며 또 가리키며 나타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과 집이 나무처럼 울창해지면 이미 거기에는 숲이 있고 통코난이 있다. 반면 말씀을 수놓는 기독교의 어휘, “용서,” “사랑,” “평화”와 같은 말들은 닮음과 가리킴으로 말하지 않는다. 상징으로 말한다. 퍼스는 인간 언어의 많은 부분을 채우는, 다른 기호들과의 추상적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나타내는 기호를 ‘상징’이라 불렀다.10 ”용서,” “사랑,” “평화”가 과연 그러하여, 이 말들은 기독교적 담론의 의미 체계를 통해 기독교인의 연대를 나타낸다. ‘말씀’은 상징으로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말씀’은 동시에 숲을 닮아야 한다. 퐁인탄이 구술한 ‘생애사’의 숲이자 이제 곧 망라라 의례를 치러 ‘통코난’이 될 집, ‘넷포까테’와 닮아야 한다. 유수프 목사가 선포한 ‘말씀’은 바로 그 집을 위한 망라라의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넷포까테’가 사람, 나무, 집으로서 땅에 뿌리를 박았듯, ‘말씀’은 ‘지금 여기’ 망라라의 ‘문맥’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래야 통코난 룸바엣을 위한 ‘말씀’이 될 수 있다. 이어지는 유수프 목사의 설교는 바울이 전한 ‘말씀’을 망라라의 문맥 속에서 해설하는 데에 대부분 할애되었다. 목사의 설교는 토라자 교회의 목사들이 추구하는 “문맥적”(I: kontekstual) 설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목사는 토라자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 이렇게 말한다.11

우리가 모인 것은 가축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친족의] 피와 뼈12로 묶어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혈육의 관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혈육의 관계 속에서 튼튼하다면
자연히 기쁨과 평화와 번영이 나타날 터입니다
...
그러나 혈육의 관계는 사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유수프 목사는 “가축의 피를 흘리”는 의례 즉 망라라를 ‘말씀’의 문맥으로 환기한다. 동시에 목사는 이 문맥의 어떤 부분을 부정한다. 가축의 피를 흘리는 것 자체는 이 자리의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에는 역설적 울림이 있다. 앞마당을 메운 돼지 피의 선연한 빛깔, 이따금 코에 시큰대는 날고기 냄새,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모인” 이유는 아니라는 목사의 설교가 교차하는 역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목사는 망라라의 전(前)기독교적 판본, 통코난 가옥에 돼지 피를 뿌려 조상의 영으로부터 축복이 임하길 기원하는 의식을 염두에 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니, 축복의 권능 역시 하나님에게 있다. 가축의 피와 조상의 영에 그런 권능을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이교도가 된다. 물큰한 핏빛과 살내음은 우상을 숭배하는 데는 충분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섦기는 예법과 어울리려면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하여 목사는 가축의 피가 아닌 다른 피, 즉 혈육의 피를, 통코난 룸바엣의 “기쁨과 평화와 번영”을 견인할 매체로서 내세운다. 이 피는 기독교적 ‘사랑’의 매체이기도 하다. 유수프 목사는 바울이 “완전하게 묶는 띠”라고 표현했던 ‘사랑’을 망라라가 기념하는 친족간 유대의 매체, 즉 “피와 뼈“와 등치한다. 그렇게 ‘말씀’은 “문맥화”13된다. “용서”와 “사랑,” “평화”는 혈육간 유대와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실한 사랑“으로 통코난을 “튼튼히” 세우는 의례의 ‘문맥’에 임한다. 그렇게 통코난 룸바엣 역시 말씀의 ’문맥‘이 된다. 말씀의 ‘집’이 된다.

그렇다면 통코난을 통코난으로서 승인하는 의식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다시 말해, 통코난은 어떤 수행을 통해 명실상부 ‘통코난’이 되는가? 기독교화 이전의 망라라에서는 간단한 문제였다. ‘망라라’(T: mangrara)의 축자적 의미는 피, ‘라라’(T: rara)를 뿌리는 일이다. 긴 처마를 올린 가옥에 돼지 피를 뿌리면 통코난이 된다. 닮은 것이 닮은 것을 나타내는 표상의 숲에서 돼지 피는 쉬이 친족의 피이자 조상의 피이다. 이 피를 매개로 통코난은 라푸의 집이자 몸체가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런 ‘망라라’를 할 수 없다.

설교를 마친 후 유수프 목사는 연단을 내려와 돼지들의 살더미를 가로질러 갔다. 뒤돌아 통코난과 마주서고는 라푸의 대표들을 불러모아 일렬로 서게 했다. 이어서 목사는 한 손을 치켜들어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못 고풍스러운 토라자어로 목사는 이렇게 기도한다.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조물주시여
여기 통코난이 잘 섰으니
아버지이신 주님, 예수님, 성령님의 이름으로
여기 통코난에 피가 뿌려졌습니다.
뭇 라푸가 함께 축복 받으니
우리 모든 삶에서 복되립니다.

유수프 목사는 통코난 건물에 어떤 피도 뿌리지 않았다. 다만 한 손을 쳐들고 기도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목사는 “여기 통코난에 피가 뿌려졌”다고 선언했다. ‘망라라’(피 뿌리기)라는 구체적 행위를 수행적(performative)14 발화로 대체하는 이같은 기도는 ‘상징화 기도’(I: Doa Simbolisasi)라고 불린다. 무엇을 ‘상징화’하는가? 이 상징화의 신학적 논리는 후일 의례연설가 요하네스 씨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15 망라라 잔치에서 도축되는 돼지의 피는 친족의 피,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이 상징적 보혈이 통코난을, 친족의 유대와 기독교적 사랑을 상징하는 건물로 인준하는 것이다.

이렇듯 상징화 기도는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 기도는 우선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설교를 통해 문맥화된 직후에 발화됨으로써 효력을 띤다. 말씀의 상징적 힘이 기도의 수행적 힘을 견인하는 것이다. 상징화 기도는 ‘상징적’ 말씀의 힘을 빌려, 기독교의 ‘상징적’ 어휘 중에서도 지고한 이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통코난에 ‘상징적’ 피를 뿌린다. 꼭 그렇게, 돼지 피를 흘리는 의례였던 망라라는 기독교적 상징의 의례로 전향/개종한다.

통코난 룸바엣의 망라라 의례는 두 개의 사뭇 이질적인 ‘집’의 표상이 겹쳐지는 자리였다. 퐁인탄의 연설은 조상 넷포까테의 집을 거목처럼, 대나무 군락처럼 번성한 집으로 표상했다. 통코난이 되어 마땅한 집들의 숲으로 나타냈다. 반면 유수프 목사가 선포한 말씀은 동일한 집을 신의 말씀이 울려퍼지는 말씀의 집으로 표상한다. 전자에서 집은 사람과 나무를 가리키며 닮고, 후자에서 집은 상징하는 말씀의 복판에 상징으로서 선다.

물론 이들 두 집은 모두 돼지의 피가 흐르는 ‘망라라’의 자리이다. 한쪽에서는 문자 그대로 흐르는 피, 다른 한쪽에서는 상징적으로 흐르는 피이지만 말이다. 또한 두 집은 같은 자리에서 서로 닮은 것을 나타낸다. 둘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져오며 번성한 친족끼리의 유대를 나타낸다. 이 닮음을 예시하듯 유수프 목사의 기도는 토라자 전통의 의례언어를 ‘닮은’ 고풍스러운 말로 이뤄졌고, 퐁인탄의 연설은 기독교적 축복의 언사로 끝이 났다.

그렇게 두 집은 망라라 ‘잔치’에서 자리를 함께함으로써 ‘한 집’에 가까워진다. 집에서 집으로 오고가며 복수의 집이 ‘한 집’이 되어가는 토라자식 교제의 논리는 이 기독교화된 망라라 잔치를 관통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라푸는 누구도 “벽 밖에 두지 않고, 집 밖에 두지 않”16는 커다란 ‘한 집’의 가족이 되라며 하객들을 환대했다. 마찬가지로 라푸는 ‘말씀의 집’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환대함으로써 그들의 통코난이 교회를 닮은 ‘말씀의 집’이 되게 했다. 통코난과 교회가 ‘한 집’이 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퐁인탄의 의례연설도, 교회의 예배도 오롯한 환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서두에서 나는 의례의 ‘본편,’ 예배가 아직이라고 썼다. 헌데 망라라는 의례일 뿐 아니라, 또 의례이기 이전에 잔치이다. 통코난 룸바엣의 번영한 라푸와 수많은 하객이 통코난 앞마당에 모인 것은 단지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활기찬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다. 유수프 목사는 “우리가 모인 것은 (...) 혈육의 피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과연 그러하나, 친족의 “피와 뼈”를 튼튼히 하려면 잔치의 활기 속에서 뭇 사람이 함께 먹고 마셔야 한다. 망라라는 끝나지 않았다. 잔치가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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